대외활동 합격후기
KOICA 코이카봉사단 자기소개서 "나도 누군가에게 세상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

링커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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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항목은 10줄 이내로 공백, 줄바꿈 포함 한글 500자 혹은 영문 1500자 이내로 작성하여 주십시오.) 자기소개서 항목을 불성실하게 작성할 경우 불합격처리 될 수 있음을 유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해외봉사단에 지원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나도 누군가에게 세상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 처음 제게 심장이 뛰는 꿈이 생기자마자 저는 봉사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헌혈, 장기 기증서약, 조혈모 세포 기증, 컴퓨터 수리 봉사, 어린이집 연극봉사, 지적장애인 시설 학습 멘토링, 탈북동포지원, 유니세프 정기후원 등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구체적인 직업적 목표가 정해지지 않은 산발적인 활동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절 움직인 선배가 있었는데, 그 선배는 누구나 가지는 세상을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을 꿈으로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선배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지만, 한 학기 동안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했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선 선거활동을 했습니다. 세상을 바꾸려면 강대국인 미국을, 그것도 그 지도자를 바꾼다면 가능할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 11월 4일. 오마바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제 자신으로 인해 보다 많은 사람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계기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그 때, 저는 세계를 꿈꿨고 KOICA가 다가왔습니다.
* 성장 과정과 특기할 만한 인생경험에 대해 쓰십시오.
20대의 1000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일을 했습니다. 집안 형편은 어려웠고 아버님께서 쓰러지신 것입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수술비가 남았습니다. 저는 그 이후, 하루 5시간 이상 자지 않는 '아침형 올빼미'가 되었습니다. 현실을 이겨내며 끈기와 근성을 길렀습니다.
이후엔 외부장학금에 도전했습니다. 서류전형 준비를 위해 담당교수님을 찾아갔었고, 변화는 시작되었습니다. 최종 발표일 저녁, 저는 합격자 명단에서 제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교수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고생했다.”, “축하한다.” 같은 내용을 생각했지만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번일이 네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저는 그 순간 1500만원에 가까운 장학금의 금액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제 자신이 너무나 어려 보였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제 인생 전체를 바라본 것입니다. 저는 그 순간 제 심장이 뛰는 꿈을 처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세상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
*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꽃샘추위가 따스한 햇살에 자리를 넘겨주고 학생들의 교복도 가벼워지던 어느 날, 체육시간이었습니다.
“용형! 어디 넘어졌어? 깁스했네?” 방금까지도 화사하던 교실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저거 의수(義肢)야.” 저는 순간 멍해졌습니다. 그 동안 별 허물없이 지내던 친구가 알고 보니 몸이 불편했다니요. 저는 너무도 미안했지만 섣불리 말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중 용기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넸습니다.
“허물없이 대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그렇게만 대해주면 좋겠어.”
이때부터 제가 사람을 만나면서 허물없이 다가간 것 같습니다. 장애우, 편부모 가정, 공황장애를 가진 친구부터 부잣집친구들까지 편견을 버렸을 때, 남는 건 모두 같았습니다. 그건 자신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편’이 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아니며 잘나고 못나고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종이나 피부색 종교관과 정치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친구’니까 네 ‘편’이고 너 역시 나의 ‘편’이면 그만인 것입니다. 이러한 무조건적인 신뢰가 저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지원직종과 관련되는 경험이나 지식(기술)이 있으면 기술하여 주십시오.
[Memories of Bluescreen: A problem has been detected and windows has been shut down to prevent damage to your computer.]
고1, 제 생애 첫 PC엔 윈도우ME가 탑재되어 있었고, 저는 윈도우 환경에서 경험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에러를 겪었습니다. 그 이후 저사양 PC최적화부터 시작해서 각종오류해결, 윈도우 재설치 및 멀티부팅까지 이 시기에 익혔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일을 통해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군 생활 2년간 탄약관리병을 하여 탄약관리시스템을 운용하였고, MS-Office를 활용한 결재 서류를 작성했습니다. 이후 실시된 ‘탄약지휘검열’에서 정확한 운용능력과 신속한 보고서 작성능력을 인정받아 포상도 받았습니다. 제대 후엔 학생조교로 일하게 되면서 전자교탁과 기자재 등을 관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성실한 태도와 탁월한 작업능력을 인정받아 학부장 교수님 PPT를 1년간 전담하여 작성하였습니다. 그 후 CLUU라는 어플리케이션 회사에 입사하여, 동영상 인코딩, 업로드 등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프리미어, 베가스, 포토샵 등을 활용하여 영상을 수차례 직접 제작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100명 이상을 관리하던 독서실에서는 단순하고 반복되는 작업을 매크로와 프로시저를 활용해 자동화하였습니다. 저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급여가 인상되기도 하였습니다.
* 지원직종과 관련하여 가장 자신 있는 부분과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기술하여 주십시오.
“비행기도 못 타본 녀석이 무슨 해외봉사를 한다고……”
저는 항상 주변에 제 꿈을 말하고 다닙니다. 저를 응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집안 형편으로 인해, 현재 외국으로 나가본 경험이 없습니다. 저는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진 않지만 ‘해외봉사단’에 있어 부족한 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점도 제 장점으로 극복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제 최대의 장점은 ‘맨땅에 헤딩’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그리고 강하게 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더라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마인드입니다. 저는 이러한 ‘마인드’를 기반으로 Dream Factory라는 영어 회화 스터디에 매주 참여해 왔습니다. 서투르고 어색해도 항상 저와의 대화는 즐겁다는 이야기에 기분이 좋았고 더욱 적극적으로 임했습니다.
해외 봉사단은 기본적으로 현지어에 대한 학습을 하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봉사자는 어느 국가로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러한 ‘마인드’는 더욱더 빛을 발하리라고 생각합니다.
* 지원직종과 관련하여 저서, 논문, 연구 또는 프로젝트 수행실적과 제3자를 대상으로 지도나 훈련을 시킨 경험이 있으면 기술하여 주십시오.
단편소설 ‘해안선을 따라 걷는 남자’는 MS-Office기반으로 제작된 E-Book입니다. 현재 안드로이드 무료 도서 분야 191위에 있으며 MS-Word로 작업을 했습니다. 이 외에도 장학회보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MS-Word, Publisher, 포토샵 등을 활용하여 ‘나눔터’를 편집하였고 올해 말 책자로 나올 예정입니다. 교내 팀 프로젝트에서도 이때의 경험을 살려 ‘햇빛이 쏟아지는 날들’ 전시회 취재기 또한 작성하였고 12월 중, 소책자로 나올 예정입니다.
이어서 지도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 말은 제가 SK브로드밴드에서 PC원격 수리기사로 일했던 시기에 접한 고객의 연령대입니다. 말을 할 수만 있다면, 전화를 걸 수만 있다면 제게 연결되었습니다. 링크를 불러주고 원격 접속 모듈을 받아 원격 접속까지의 세 단계를 거치면 제가 원격으로 고칠 수 있는 모든 부분을 처리해주었습니다. 첫 달을 제외하곤 항상 하루에 60대 이상씩 처리를 하였고 성과급도 지급 받았습니다. 저는 이때의 경험으로 어느 누구도 가르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이 후에 갖게 된 직업에서도 인수인계, 신입교육 분야에서 도움이 되었습니다.
* 부모님 또는 가족과 떨어져 생활한(특히, 자취한)적이 있다면 그 시기, 기간 및 사유를 약술하여 주십시오.
가족과 가장 오래 떨어져 생활한 기간은 군 생활 동안이 아닐까 싶습니다. 2년의 기간 동안 가족들과 떨어져서 살았던 그 기간 동안 많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모든 걸 군대 다녀오고 난 뒤로 미뤘었지만 군 복무 기간이 끝나면 해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곳에서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왜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할 수 있었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후, 제 스스로 다짐 한 것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기’입니다. 저는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는 조교 실에서 일했고, 7시가 되면 근처의 커피숍에 가서 바리스타로도 일을 했습니다. 그 일은 새벽 1시 반까지 이어졌는데 그렇게 되면 막차가 끊겼기 때문에 집으로 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근처의 고시원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때 발생한 비용도 제가 지불하였습니다. 이때의 생활이 호락호락 했던 건 아니었지만, 혼자 사는 나름의 재미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약 한 한기정도 생활한 뒤, 가족의 소중함을 느꼈던 건지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 해외에 2년 이상 파견되어 있는 동안 개인적으로 가장 염려되는 일은 무엇입니까?
“엄마, 나는 왜 형제가 없어? 없으면 문방구에서 사오면 되잖아? 우리 동네처럼 작은 문방구 말고 큰 곳에서!”
초등학교 1학년 시절, 저는 친구와 카드 멀리 날리기를 해서 300장의 카드를 땄습니다. 4시간 승부의 결과물이었지만, 불과 14분 만에 친구의 누나 7명이 찾아와 그 카드를 모두 빼앗았습니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어머님께 이런 저런 말을 하며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그 날 이후 10개월 뒤, 동생이 태어났습니다. 저는 동생에게 직접 분유도 먹여주고, 어부바도 해주면서 기저귀도 갈아주었습니다. 이런 동생이 지금은 고1인데, 2년 뒤엔 고3이 됩니다. 저 역시 수능을 본 세대이고 수능을 보기까지의 어려움 속에서 비뚤어지는 친구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제가 가장 염려되는 부분이 바로 이 점입니다.
오랜 시간 고민했지만, 제가 곁에 있는 것 보다 모범을 보이는 편이 어쩌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생에게 제가 없는 기간은 자립심을 기를 수 있는 기회이자, 다른 조언자나 친구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기간 동안 사랑하는 제 동생을 믿어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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