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들어오고 딱 1년이 지났을 때 현타가 왔다
점수 퍼준다 퍼준다 하는 시기에 다녔는데도 성적표에 2점대 성적이 있더라
사람 만나기도 싫어지고 하던 편의점 알바도 관뒀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울했던 거 같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했는데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하기도 싫어서 도망을 쳤다
무작정 기숙사 신청 미루고 짐 빼서 고향에 갔다
그대로 휴학을 했다
비오는 날 회츄입고 동네를 돌아다니는데 그날따라 회를 먹고 싶었다
동네 시장인지라 현금 아니면 안 된대서 에이티엠기로 돌아갔다
2만3천원 있었는데 2만1천원 뽑아서 회를 샀다 광어를 사서 돌아오는데 걔를 만났다
그게 2년 전이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그냥 무시하고 갈라고 했다
너무 작고 마르고 더러웠고 다가가면 달려들까봐 조금 무서웠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근데 그날따라 시장 입구에 차가 많더라 뭔 동네구 유세를 한다고
그래서 친구들이 추르 가지고 하던 거 어설프게 지느러미로 흉내내서 집에 데려왔다
날거 먹여도 되는지 몰라서 다 익혀갖고 애 먹이고 단톡에 말했더니 다들 쌍욕을 하더라
고양이 마음대로 주우면 안 된다고
책임질 자신 있냐고
없었다
아무 생각도 없고 책임도 없었다
내 성적 하나 못 보겠어서 휴학했는데 길러본 적도 없는 고양이를 어떻게 기르냐
그래서 그냥 내보내려고 했더니 걔가 배 까놓고 자더라
집에 들어온 아빠가 2차 쌍욕을 했다
야생 고양이 주워오면 진료비가 얼마나 드는지 아냐고
그래서 저녁에 해가 지고 나서 귤박스에 넣어서 데리고 나갔다 좀 걸어가니까 버정 근처에 씨유가 있어서 츄르 하나 딸랑 사서 남은 잔액 다쓰고 걔를 먹였다
근데 따라오더라
겨우 먹이 두 개 줬다고 따르는 모습이 마음이 이상했다
근데 그게 아니면 안 될 거 같아서 다시 데려왔다
아빠한테 등짝 다시 얻어맞았는데 날 반쯤 포기한 것 같았다
매일 하루에 3시간씩 고양이 기사를 읽었다
조선일보가 반려동물 기사를 많이 쓰더라
모래 깔아주는 것도 밥 사맥이는 것도 건강검진 하는 것도 너무 비싸서 등록금 내려던 통장에 빵꾸내서 애를 키웠다
그러다보니 또 돈이 모자라서 알바를 시작했다
걔가 뭐라고 그렇게 하기 싫던 홀서빙도 하고 주방보조도 해보고
근데도 편의점은 다시 못 돌아가서 불규칙적인 일용직을 많이 했다
집 돌아오면 걔가 있었다
이름을 특이하게 지어줘서 부르면 다 지이름인 줄 알았고
낯선 사람들 오면 경계하느라 냉장고 뒤로 사라지다가도 어느새 내 등뒤에 와있고 그러는 게 기특했다 날 알아보나 싶어서
어느 날은 집문 열고 대청소를 하는데 없어졌더라
혼비백산해서 미친듯이 찾고 다녔는데 나중에 세탁기 밑에서 자고 있었다
걔랑 그렇게 일 년 있었다
게임하면 자꾸 무릎 위에 올라오고 마우스 잡은 손 핥고
옛날엔 내가 큰소리 내면 도망가더니 그땐 겜하면서 욕을 해도 익숙해졌는지 내 책상 밟고 다니고 배기 나오는데서 자고 그러더라
그럼 그거 또 깨우기 싫어서 게임도 존나 조금만 했다
남는 시간에 다시 알바도 하게 되고 친구들하고도 다시 만나고
술도 좀 마시고 그냥 평범하게 일 년 축냈다
토익책 사다둔 건 1페이지도 안 봤고 대신 정기구독한 고양이 잡지만 봤다
우리 애 사진 찍어서 뭔 반려동물 게시판에 올렸는데
다들 쥰나 이쁘다고 사랑 많이 받은 거 같다 이런 댓글 달리는 거 보고
옛날보다 살도 쪘고 털도 길어졌다는 걸 알았다
나는 그동안
누구도 반겨주지 않던 인생을 걔가 아껴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걔한테 존나 잘하고 싶었다
그게 헛된 게 아니라고 당당해지고 싶었다
그러다가도 자꾸 나쁜 생각이 들더라
정신과에 갔는데 젊은 나이에 흔하다고 했다
나한테 살아있을 이유를 소소하게 만들라고 했는데
집 돌아가는 길에 걔 얼굴이 생각나더라
그래서 다시 광어를 사서 갔다
옛날엔 몇 점 안 먹더니 이제 주는대로 다 먹더라
존나 비싼 거야 임마 하고 말해도 모른다는 눈 파랗게 뜨고 초롱초롱 보더라
하나도 억울하지가 않아서 걔 다 주고 나는 깡소주 마셨다
형 복학한다고 집 떠나올 때 어떻게 알았는지 평소엔 옆에 불러도 안 오던 걸
일주일 전부터 내 옆에서 자더라
만져봤는데 너무 뜨끈했다
고양이 살찌면 개 무거운 거 아냐
우리 애는 등살에 파묻혀 뒤에서 보면 얼굴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근데도 그 얼굴 보고 싶어서 자꾸 괴롭히게 되더라
손등 얻어맞고서야 그만뒀다
그리고 작년에 복학했다
나 걔 생각하면서 정말 열심히 살았다
첫학기에 3.75가 나왔다 성적표를 아빠한테 자랑하면서
다음 학기에 4점대 맞으면 캣타워를 사자고 졸랐다
우리집 고양이만 너무 뚱뚱한 거 같다고 더 살찌면 관절에도 안 좋다고 어디서 주워들은 거 읊어대니까 아빠가 그러자고 했다
나 없는 사이에 둘이 겁나 친해졌더라 보기 좋았다
여전히 걔는 나를 좋아했다
내 양말을 핥거나 자꾸 벗어놓은 옷 위에서 잘 때마다 인터넷에 검색했다 그래서 나는 자꾸 걔를 알아가느라 바빴다
나 없을 때 새로 생긴 버릇들을 열심히 찾아보다가 방학이 다 지났다
우리 고양이 품종도 근데 그때 처음 알았다 그동안 신경도 안 썼는디
다음 학기에 4.0을 맞았다 아슬아슬했다 솔직하게
석차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학과내 10위권 중후반이었다
근데 참 사람 마음이 이상하더라
기쁠 줄 알았는데 좀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마음이 생기더라
내가 하는 일에 욕심이 생긴 게 처음이었다
캣타워 사주겠다는 아빠 말 미루고 됐다고 카메라 사서 겨울 방학 내내는 걔만 찍었다
창가에 앉아있는 뒷모습이 너무 뚱뚱해서 웃겼는데 걔는 하여간 그렇게 생겼어도 여기저기서 사랑받아서 아쉽지도 않을 거 같았다
올해는 뭔갈 더 해보고 싶었다 걔 때문에
21학점을 전부 신청해두고 기숙사 들어오면서 아빠한테 전화도 했다
이번 학기도 성적 잘 나오면 내년에는 자취방 얻어도 되냐고 나
걔랑 살고 싶다고 했다 보고 싶다고
오죽하면 지나가는 고양이를 보는데도 걔 생각이 나더라
출장가는 길이니까 갔다와서 생각해 보자고 나름 허락도 맡았다
그게 이주일 전이었다
오늘 치과를 갔다가 돌아오는데 아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오늘 고양이가 죽었단다
지인 집에 케어를 맡겨놨다는데 그집이 전부 코로나 확진이었댄다
고양이를 데리고 가라고도 동물병원에도 보낼 수 없어서 1주일 넘게 같이 있었는데 우리애가 뭔 바이러스 변이에 걸렸단다
그말을 하는데 아빠가 울고 있었다
그깟 출장이 뭐라고 맡겼냐고 차라리 날 부르지 그랬냐고 지랄했다가도 이번 학기 바쁘겠네 하던 아빠한테 화도 낼 수 없어서 말았다
꼭 자취방 얻어서 걔랑 잘 살고 싶었는데
학교 핑계 안 대도 될 때쯤 여유있게 같이 지내고 싶었는데
형이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더라
오늘 오후 수업 자휴하고 지금 수원역에 가고 있다
집에 가볼라고
그래도 걔 덕분에 존나 잘 살아있는데 내가 보러가는 게 맞는 거지 싶다
모르겠다
사람이 살면서 이렇게 막막해도 되나 싶고 그냥 울고 싶다
술 안 마셨는데 차라리 술이라도 마시고 싶다
오늘 날씨도 좋다던데 대낮에 두서도 없이 이런 글 써서 미안하다 욕만 하지 말아주라
반려동물 키우는 친구들 있다면 언제나 걔네가 주는 사랑에 감사하면서 살면 좋겠다
그런 시간으로 나같은 인생이 구원받기도 하니까
고맙다 읽어줘서
작성자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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